최인훈, 『회색인』

1963.

3판, 민음사, 2008(1977).

 

“회색의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서 몽롱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만 하자는 이 몸가짐. 그러면서도 학의 말에 반발하고 싶고 그들이 만들고 있다는 모임에 퍼뜩 생각이 미치곤 한다. 나라는 놈은……” (84쪽)

“아니, 문제는 그런 데 있지 않다. 남의 욕망을 깨우쳐준다는 주제넘은 생각을 자기 삶의 목표로 삼는다는 일이 우리 세대에서도 청년의 자세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.” (112쪽)

“우리에게는 그나마 바위에 손대는 것도 허용되지 않고, 시시포스의 엉덩이를 밀고 있을 뿐이다. 어떤 친구들은 이걸 착각하고 있다. 그래서 바위가 왜 이리 구리냐, 하고, 물컥하냐, 하고 고민한다. […] 우리는 ‘시시포스의 엉덩이 밀기꾼’쯤이다. 그래서 우리들의 괴로움은 시시포스의 고결한 고통과 수난의 얼굴을 닮지 않고, 늘 어리둥절하고, 환장할 것 같고, 겸연쩍고, 쑥스럽고, 데데하고, 엉거주춤한 것이다. 틈만 있으면 엉덩이에서 손을 떼고 달아날까 해서. […] 그런데 어떤 아저씨들은 우리더러 자꾸 시시포스라 한다. […] 어떤 과욕한 학부형처럼. 자기가 낙제했던 일을 까맣게 잊은 어떤 학부형처럼. […] 우리들의 바위. 그런 것은 없다.” (245쪽)

“아니면 이 소란스러운 시대에 영원에 봉사할 것인가. 신문지와의 경쟁을 버리고 어느 밀실에 틀어박혀서, 모든 문학 외적인 잡것을 솎아버리고,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는 엘리먼트를 시험관 속에 노려보면서 더 큰 폭발을 위한 연구를 할 것인가. 당장 한 사람의 적병을 죽이지는 못할망정, 더 위대한 무기를 위하여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. 그러나 신무기가 되기 전에 조국이 패전한다면?” (261쪽)

“만일 재능이 허락하고 다시 한 번 선택할 수 있다면 그는 화가를 택하리라고 생각한다. 현상의 다양성을 색채와 형태라는 요소에 환원해서 존재의 도식을 만드는 것. 그것은 역시 體系에의 욕망이었다. […] 현상의 다양을 정리하는 최저한의 공식을 만들고 싶다는 것. 그것이었으리라. 그러나 한번 圖式을 만들어놓으면 사람은 그 값으로 에고를 잃는다. 에고는 보편의 바다에 빠져서 없어진다. 그것은 해결이 아니다. 그것은 퇴화다. 보편과 에고의 황홀한 일치. 그것만이 구원이다.” (271쪽)

“어느 한 군데가 막힌 사람을 타이르느니 그대로 두는 편이 낫다. 그들은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. 이 세상에 아름다움과 착함을 남겨놓기 위해 생긴 그런 사람들이다. 만일 김순임에게 믿음이 없다면? 그것이야말로 바람직한 일이다. 그러나 어린애 손에서 사과를 뺏을 수는 없다.” (276~277쪽)

 

(2017.04.03.)